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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아'를 찾아
줏대 있게 찾아가는 조선상고사

"꼬여있던 역사관이 해결되는 느낌이다", "내 안에 사대성이 얼마나 깊숙이 박혀있는지 알게 되었다", "단재 선생님의 치밀한 구성력과 논리력을 배우고 싶다" 8월 21일~23일, 2박 3일 동안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조선상고사> 공부로 강원도 홍천 밝은누리움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삼일학림 학생들이 남긴 소감이다. 밝은누리움터에서 배우며 가르치고 있는 정인곤, 고영준, 박민수, 오승화 님은 두 달 전부터 미리 공부하고 자료집을 만들고 발제를 준비했다. 이들이 조선상고사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들어봤다. 좌담은 서면으로 진행했다.(편집자 주)


- 삼일학림에서 조선상고사를 함께 공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영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줄줄 외는 것을 자랑으로 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고대사를 배울 때도 단군신화로 대강 얼버무려 배웠습니다. 사대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이 땅 역사가 수백 년 동안 한없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제가 이 땅 역사를 찌그러뜨리고 간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잔재로 인해 우리 역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중국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생겼는데 말입니다. ‘우리 역사’가 훼손된 만큼, ‘우리 얼’도 쪼그라들고 찌그러지고 왜곡되었습니다. 조선상고사를 공부하는 의미는 우리 얼을 회복하고 밝히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아(我)’의 과거를 제대로 알고,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선상고사 공부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민수 역사는 자기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라는 존재, ‘나라’라는 조직체가 건강하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든 초기 역사는 논란이 많습니다. 기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 역사처럼 상고사에 관한 논란이 많은 곳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첫 출발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아(我)’를 찾고 새 시대 생명평화의 역사를 써가기 위해서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상고사는 어그러진 ‘아’를 온전히 찾아가는 데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인곤 단재 신채호는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고 했습니다.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인정하면서도 거대한 역사 왜곡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역사라면 반드시 함께 가야 할 것이 ‘아’의 주체성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군조선 초기 역사는 사료가 망실되어버렸으며 특히 삼조선(혹은 삼한)에 관한 국내 사료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첫째, 외침으로 인해 소중한 사료들이 소실된 탓입니다. 둘째로 고려 후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독립자존의 사료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서경전쟁(소위 묘청의 난) 관련 문헌들을 엄밀하게 검토하면서 사대주의 경향이 침투하게 되는 시점을 확인했습니다. 김부식 이후 역사가들은 중국의 춘추필법 역사서를 사대적으로 베껴 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일단 시급한 것이 조선의 얼을 되찾는 것이며 조선의 ‘아’를 분명하게 확정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조선의 ‘아’는 ‘비아’와의 싸움에서 스스로를 지켜냈으며 때때로 ‘비아’들을 제압하고 그 강성함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오승화 조선상고사를 집중해서 공부한 것은 지난 겨울 ‘삼일학림 교사연수회’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그 때는 해외공동체 순례를 앞두고 있었는데, 타문화를 경험하기 전에, 나의 뿌리를 바로 알고 가시적 힘에 주눅 들지 않도록 내 ‘얼’을 단속하자 선택한 공부였습니다. 20대 말, 잠시 외국생활을 한 적 있는데, 풍요로운 생활에 안주하고 싶던 나를 지켜준 것 중 하나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습니다. 지난 겨울 <조선상고사>도 그렇게 나를 지켜주었고 타지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책을 만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렇게 내게 힘이 돼준 공부를 삼일학림 학생들에게 잘 소개하고 싶어 이번에도 함께했고, 학생들도 기대하며 책을 읽고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 <조선상고사>는 훼손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으려 쓰인 책이다. 또 어떤 가치가 있는가?

정인곤 조선상고사를 접했을 때 첫 느낌은 그동안 알던 한국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사를 이미 100여 년 전에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 역사는 현재까지 심각하게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역사의 기원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그 기록을 근거로 자신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입니다. 우리 초기 기록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조선 역사는 기원전 24~23세기에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5세기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 중국 문헌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중국 문헌들은 조선에 관한 기록을 자기중심적으로 쓰고 또한 중국 측에 불리한 기록을 습관적으로 빼거나 왜곡해왔습니다. ‘춘추필법’으로 쓴 중국 문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사대적으로 따랐으니 우리 역사 왜곡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박민수 조선상고사가 일제치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만 국한시키면 조선상고사가 진정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몇몇 진보 역사학자들은 단재 신채호의 논의가 일제시기에나 유의미했지 지금은 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견해는 결국 조선상고사의 의미를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좁은 의미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조선문화사>에서 단재 신채호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우리 땅에서 형성된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주목합니다. 특히 묘청사건에 주목하고, 그 이후 면면히 흘러왔던 우리 고유의 화랑사상과 화랑집단이 유교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우리 역사 왜곡의 진원지를 찾아내려가 그것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왜곡이 발생한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단재 신채호는 가르쳐줍니다.

오승화 <조선상고사>는 일제 때 쓰였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사대성, 그 근원을 따지고 이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제시대 뿐 아니라 지금 읽기에도 의미가 큰 책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체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요? 식민치하에서는 무력으로 그들 문화를 따르도록 강요당했다면, 지금은 우리 스스로가 돈을 주고 앞 다투어 제국의 식의주락, 말과 생각을 따라하려 안달이니 더 큰 비극입니다. 성서가 제국의 문화나 신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창조주만 섬기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면 <조선상고사> 역시, 외부의 큰 힘이나 반도라는 땅 안에 우리를 쪼그라뜨리지 말고, 빛나는 얼과 기상을 일깨우며 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고 해방되는 느낌이 듭니다.

- 단재 신채호가 고군분투하며 가려진 조선 역사를 고증할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정인곤 단재 신채호는 20세기 초 망국의 위기 속에서 구국의 심정으로 역사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역사 왜곡의 원인으로 중국의 춘추필법과 조선의 사대주의적 경향을 꼽았습니다. 조선 역사서 간의 모순, 중국 측 역사서의 거짓을 바로잡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사료를 탐색하였고 만주 일대 현장탐사도 병행하였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조선상고사>입니다. <조선상고사>는 논리가 치밀하고 내적 일관성이 탁월한 역사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역사학은 한국사에 수용되지 못하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단재의 역사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사대주의가 극성이던 고려 중기 이후 일천여 년 동안 의도적으로 주체적인 문헌들이 감춰지거나 없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증주의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사가로서 게으른 것입니다. 단재는 위서와 진서를 가려내고 위서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노력을 해서 단군 조선의 역사성을 증명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탈근대적 맥락에서 단재의 역사학이 근대민족 개념에 토대하고 폐쇄적 국수주의(혹은 국가주의) 경향이 있다고 평가절하합니다. 이들은 단재 신채호의 실천적/이론적 결론이 아나키즘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단재는 권력의 분산과 균형, 자치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런 면에서 단재는 민족적이라기보다는 탈민족적입니다.

오승화 조선상고사를 공부하기 전, 제겐 단재 신채호가 그저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일뿐이었습니다. 단편적으로 인용되는 자료만으로 그가 배타적인 국수주의자일 꺼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영토 회복도, 권력 추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진실을 밝히는 아나키스트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이승만을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미국에 팔아버린 자”라 비판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합류를 거부하고 망명했습니다. 소위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기만에 염증을 느낀 단재 신채호는 타국에서 배를 곯으며 우리 역사를 연구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는 조금의 타협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쉽게 타협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근성이라 생각합니다. 그 시대 그런 여건 속에서 다른 역사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방법으로 꼼꼼하게 고대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영준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쓴 목적은 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찌그러지고, 쪼그라든 ‘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료가 없다고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 것, 또 역사를 다른 누군가가 찌그러뜨리거나, 남 눈치 보며 내가 스스로 깎아버리는 것은 역사 서술의 기본에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 역사가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길일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사료들이 소실된 상황에서 이두문자 해석과 진서와 위서를 넘나드는 역사서 상호 검증, 현지답사, 민간 이야기 수집 등으로 역사 연구방법의 길을 창의적으로 걸어간 것이라 평가해야 정당할 것입니다.

그가 철저하게 밝혀낸 진실이 우리 조선의 찬란한 역사였다고 해서, 그것을 민족주의로 연결시키고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고 규정짓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단재 신채호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사람은 모두 민족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 아나키스트이건 간에 민족해방운동가로서 출발합니다. 모든 폭력의 근원인 ‘일제’라는 체제가 붕괴되지 않는 한 어떤 변혁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가 추구한 사회변혁은 그가 쓴 <조선혁명선언>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하자고 했습니다. 그런 사회는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사회였습니다. 100년 전 그의 사상과 실천을 들여다본다면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는 섣부르고 부당한 것입니다.

박민수 이번에 단재 신채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후속 연구를 한 분들의 책들을 보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그 어떤 학자도 단재 신채호가 상고사 연구를 진행하며 중요하게 여긴 조선의 사상, ‘삼신오제’와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치체제인 ‘삼한체제’(조선이 신, 말, 불조선으로 이뤄졌다는 것)에 대해선 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에 삼신오제라는 사상이 있었고, 그 세계관에 근거해 정치·사회·경제제도가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삼신오제 사상은 조선을 설명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없이 대부분 조선의 강역(영토가 어디까지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재 신채호가 복원한 조선의 모습은 엄청난 사상과 문화를 가진 나라이고, 주요 정치체제가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기보다 분권적 권력체제를 지향하는 나라입니다. 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상과 세계관이 단재 신채호에게 영향을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은 땅이 넓은, 큰 나라였다고 단재 신채호는 이야기합니다. 이는 사실의 측면일 뿐 오히려 더 강조하는 바는 조선의 문화, 사상입니다. 이 문화와 사상이 주변에 어떻게 퍼졌고, 영향을 줬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땅에서 얼마나 풍성한 삶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는지를 밝혀냈습니다. 조선과 고구려라는 나라를 강조했지만 여느 민족주의자처럼 영토의 측면보다 문화와 사상의 측면에서 본다는 점이 제게 주목되었습니다. 이는 그대로 선생의 사상과 삶에도 이어져 아나키스트로서, 분권화된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지향하고 어느 누구도 누구를 지배하지 않는 나라를 꿈꿨다는 것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 시대에 자기정체성,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사대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고영준 2년 전 학생들과 사마천의 <사기>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양의 정신적 시원을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백가시대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 역사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물론 <사기> 자체만으로도 삶에 여러 교훈이 되는 글도 있지요. 그런데 이번에 조선상고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고민 없이 선택한 게 사대적인 발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쪼그라들고 찌그러지고 왜곡된 우리 역사, 그 역사를 배워왔던 우리의 심성에는, 우리 것을 스스로 하찮게 여기고 남의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지 않았나 합니다. 지금도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유럽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며 남의 것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는 우리 모습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배우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땅과 우리 몸과 우리 심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 대한 이해 없이 남의 것이 좋다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조선상고사는 우리 땅에 살며 대자연을 보며 발견한 철학(삼일사상)이 있었고, 그것에 근거한 통합적인 문명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인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에 그 삶의 철학을 고스란히 녹여낸 통합적인 문명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삶의 철학과 역사를 배우며, 우리 땅에 맞는 우리 몸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박민수 뿌리 깊은 사대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사대성이 똬리를 튼 근원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일제 식민사관을 방점에 두지 않고 고려시대로 파고든 단재 신채호처럼 근원으로 들어가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해나가며 자기 주체성을 더 키워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서구학자들의 이론입니다. 치밀하게 이론을 구성하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한 훈련이지만 자기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일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 이론을 단순히 적용하려고만 한다면 또 다른 사대성에 갇히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양사상이든, 서양사상이든 그 이론을 치밀하게 공부하되 항상 나의 삶, 우리의 삶과 연결해서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조선 사회의 토대가 된 수두, 선배, 화랑 집단들은 일상에서는 몸수련, 양생, 수신 등 자기 몸을 다루고 무예를 연마하기도 했고, 별자리를 보며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길렀던 자들이기도 합니다. ‘공부’라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단련하고 자기 몸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웃, 공동체, 나라 등 확장된 나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승화 이번 공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아(我)’와 ‘비아(非我)’에 관한 것입니다. ‘아’를 극복하는 것이 단재의 핵심사상이라는 사실이 새로웠다. ‘아’를 강조하는 집단, 즉 자기정체성이 뚜렷한 집단에게는 크게 두 가지 대비되는 성향이 나타날 수 있는데, 하나는 타자를 지배하려는 ‘아’가 강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아’를 비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저는 타자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강한 편이라 뜨끔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를 비우며 수련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지만, 그런 삶은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억압 속에서 노예 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소비를 통해 잠깐씩 위로를 맛보며 노동력을 담보 잡혀 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또한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온갖 잡다한 흥미꺼리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대성은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연구를 별 생각 없이 배우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고 배웠는데, 작은 선택 하나라도, 남들이 다 하는 대로 쉽게 쉽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녹여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단재는 고구려나 신라 발흥의 원동력으로 ‘선배제’와 ‘화랑’을 들고 있습니다. 화랑은 후에 그 가치가 조금 변질되기도 했지만, 먹고, 일하고, 공부하며, 수련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고 통전된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토종씨앗을 뿌리며, 생명으로 대접받고 자란 음식을 정성어린 손길들의 준비로 내 몸에 모시는 것, 친구들과 함께 참된 자아를 찾아가도록 서로 도우며 공부하는 것, 편하지 않은 삶을 통해 매일 조금씩 자기 몸을 수련하는 것, ‘밝은누리움터’의 삶이 바로 그런 삶과 조금은 비슷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개인으로 보자면, 쉽게 흔들리고 근성이 부족한 사람인데, 이런 장에 놓여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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